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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재 허백련의 예술

허백련은 산수화와 사군자화, 화조화, 기명절지화 등 다양한 화목을 두루 잘 하였다. 허백련은 남종문인화에 뜻을 두었고 이를 한평생 신념처럼 지켰으며, 남종화의 정신과 기법을 충실히 계승하여 자신의 세계로 심화시켰다. 그의 남종화는 단순히 그림의 한 유파를 따른 것이라기보다 한시와 고전, 서법(書法)을 아우르는 그의 삶이자 철학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산수화山水畵

의재 허백련은 산수를 특히 좋아하였고, 다른 어느 화목보다 산수화에서 자기화 된 변모를 잘 보여준다. 허백련은 중국과 우리나라 역대 화가들의 그림을 보고 그들의 장점을 취하려고 하였다. 특히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를 보고 깨친 바가 있어 이후로는 시간만 나면 전라도의 산천을 찾아 풍경을 가슴에 담고 화폭에 옮겼다. 그럼에도 그림의 의미를 풍경의 재현에 두기보다는 이상화된 산수를 화폭에 풀어내는 전통적인 남종문인화 의식을 고수하였다. 그의 작품은 ‘의재(毅齋)’, ‘의재산인(毅齋散人)’, ‘의도인(毅道人)’이라는 세 가지 관지(款識)에 따라 점차 무르익어갔다.

‘의재毅齋’

허백련이 ‘의재’라는 호를 쓰던 시기는 40대 중반까지로 남종화풍을 익히고 사생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남종화의 다양한 화풍을 시도하는 등 자신의 회화세계를 형성해가던 시기이다. 이 시기 작품은 대체로 중국의 대가나 화보를 방(倣)한 형식주의적인 작품경향을 보인다.

‘의재산인毅齋散人’

‘의재산인’이라는 호를 주로 썼던 40대 중반에서부터 50대 말까지는 이전 시기의 다양한 시도를 종합하여 자신만의 독자적인 화풍을 확립해 나갔다. 이 시기 작품 중에는 구도가 다양하고 필법의 변화를 살려 사계절의 풍광을 그린 작품이 많다. 역대 명가들의 화법을 두루 응용한 이상화된 산수화임에도 필치는 개성이 있고 경물은 남도지방 산야의 이미지가 결합되어 친근한 느낌을 준다.

‘의도인毅道人’

백련은 1951년 60세 회갑을 맞을 무렵 ‘의도인’이라는 아호를 쓰기 시작하면서 원숙한 의재 화풍의 진면목을 보여 주었다. 안정된 화면과 필치, 청담(淸談)한 설채가 조화롭고 운필에는 막힘이 없다. 초기에 전통을 충분히 익힌 다음 자신의 화풍을 시도하였고, 전 통적인 선비화가들이 지녔던 것처럼 그림에 대한 풍부한 안목과 학문적 교양을 바탕으로 자신의 독자적인 세계를 이룩하였다. 자연에 은거하여 다향(茶香)에 심취하고 도인처럼 살았던 그의 삶이 그림에도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군자四君子·화조花鳥·영모화翎毛畵

의재 허백련은 산수화 이외에 사군자나 화조·영모화 등에서도 자신만의 격조 있는 세계를 구축하였다. 사군자를 비롯한 다양한 화목(畵目)에서 각 소재가 갖는 상징성을 살리면서도 운치 있고 담담한 품격을 보여준다. 사군자는 문인화의 가장 기본적인 화목으로, 허백련도 일찍부터 수련을 하였지만 특히 만년에 많이 그렸다. 사군자는 그 자체만을 그리기도 하였고, 유사한 상징성을 지닌 다양한 소재를 함께 그려 그 의미를 더하기도 하였다. 사군자 외에 포도나 목련, 연(蓮), 모란, 파초, 수선(水仙) 등 문인들이 좋아한 여러 식물들을 소재로 한 작품도 남기고 있다. 허백련은 화조·영모화도 많이 남겼는데, 단독으로 그린 작품 또는 병풍에 사계절의 변화를 배경으로 그리기도 하였다.

즐겨 그린 새로는 기러기, 학, 독수리, 팔가조(八哥鳥) 등이 있다. 이러한 소재들은 문인화가들이 전통적으로 즐겨 그린 것으로 소재가 지닌 우의와 상징성을 드러내는 화제(畵題)를 함께 써 의미를 더하였다. 허백련의 문인다운 성품과 취향은 기명절지화(器皿折枝畵)에서도 잘 나타난다. 허백련은 자신의 기명절지화에 ‘청공도(淸供圖)’라는 제목을 많이 붙였는데, 맑고 깨끗함을 추구한 것처럼 그림 역시 필치가 간결하며 담백하다. 기명절지류 그림 중에는 그가 교류했던 서화가들과 합작한 작품도 여러 점 있어 주목된다. 서로의 만남을 축하하고 기념하며 화흥(畵興)을 펼친 합작도를 통해 동시대 화가들이 교유한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글씨書

의재 허백련의 글씨는 그림의 명성에 가려져 있지만, 글씨에서도 일가(一家)를 이룬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고전과 시문에 밝아 자신의 그림에 대부분 화제와 제시를 썼으며 시서화의 조화를 추구하였다. 제시뿐만 아니라 작품으로서의 서예도 많이 남겼다. 허백련은 자신의 글에서 밝혔듯이 처음에는 소치 허련의 글씨를 보고 배우면서 추사체(秋史體)를 익혔고, 이어서 진도에 유배 와 있던 무정 정만조에게 글씨를 배웠다고 한다. 이후 한나라 예서에서 당나라 구양순(歐陽詢)과 저수량(褚遂良)의 해서, 송나라 소동파(蘇東坡)의 행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서풍의 글씨를 연마하여 그림과 마찬가지로 개성적인 예술세계를 열었다. 화제와 서예 대련은 대부분 행서로 썼으며, 가로 네 글자의 화제는 고담(枯淡)한 예서를 쓰기도 하였다. 허백련의 글씨는 필획(筆劃)이 졸박(拙朴)하며, 장법(章法)의 조응이 유려(流麗)하여 전체와 부분 간의 조화가 뛰어나다. 또한 화가 이전에 문인으로서 흉중에 내재된 그의 고매한 인격과 예술혼을 글씨를 통해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