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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1891~1977)은 20세기 우리나라 남종문인화의 대가(大家)이다.

그는 화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무등산 춘설헌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농업학교를 만들어 농업 지도자를 길러냈다. 이 학생들과 함께 차밭을 일구어 차 보급에 힘썼으며,단군의 ‘홍익인간 (弘益人間)’ 정신으로 민족정신을 아우르고자무등산에 단군신전 건립을 위해 앞장섰던 교육자이자 사회운동가라고도 할 수 있다. 진도에서 태어난 허백련은 어려서 집안 어른이자 19세기 남종문인화의 대가 소치(小癡) 허련(許鍊, 1808~1893)의 아들 미산(米山) 허형(許瀅, 1862~1938)으로부터 그림을 배웠다. 또한 그 무렵 진도에 유배와 있던 무정((茂亭) 정만조(鄭萬朝, 1858~1936)로 부터 한학과 시문, 글씨를 수련하였는데, ‘의재(毅齋)’라는 호 또한 스승인 정만조가 지어준 것이다. 어려서부터 손에서 놓지 않았던 동양의 경전과 시문들은 평생 그의 삶을 이끌어준 좌표와도 같았다. 허백련은 1912년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明治大學]에서 법학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법학 공부보다는 우리나라에는 없던 박물관 미술관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고, 말로만 듣던 중국 문인들의 작품을 눈으로 직접 보고 다시 그림에 흠뻑 빠지게 되었다. 본격적인 그림 공부를 위해 일본 남화의 거장 스이운(小室翠雲, 1874~1945) 문하에서 남종화의 정신과 기법을 수련하였다.

​귀국 후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동양화부 최고상을 수상하면서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허백련은 전국의 서화가들과 교유하며 작품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일찍 이룬 예술가로서의 세속적 성공에 아랑곳하지 않고, 겸허하고 청빈한 사상가, 실천적 계몽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는 47세 때인 1938년에 광주에 정착하여 시서화(詩書畵) 동호인들의 모임인 연진회(鍊眞會)를 조직하였으며, 남종화의 부흥과 제자 양성을 위해 매진하였다. 허백련은 그의 인생에서 연진회 발족을 크게 보람되고 자랑할 만한 일이었다고 생각하였다. 의재는 연진회원들의 문기(文氣)어린 분위기와 활동이 광주에 글과 그림을 아끼는 풍조를 깊이 뿌리박히게 했다고 자부하였다.

1945년 광복과 더불어 무등산 계곡에 은거하며 1947년에는 오방(五放) 최흥종(崔興琮)(1879~1966) 목사와 농촌 부흥을 위하여 농업고등기술학교를 설립 하였다.

여러 사정으로 인해 일반고등학교 진학이 어려운 청년들이 찾아왔고, 학교 시설이나 운영이 어렵기도 했지만, 교사와 학생 모두 최선을 다해 가르치고 배웠다. 1977년 마지막 졸업생 한 명을 끝으로 문을 닫을 때까지 이곳을 거쳐 간 학생은 수백 명이었으며 20회에 걸쳐 244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농업학교를 운영하면서 허백련은 중심사 뒤편 차밭을 인수하여 농업학교 학생들과 함께 관리하였다. 이곳에서 재배한 차를 ‘춘설차(春雪茶)’라 이름 짓고 “차를 마심으로써 정신을 맑게 하자.”는 차 문화 보급에 앞장섰다. 그의 차 습관은 격식을 중시하지 않는 ‘생활차’ 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찾아온 손님과의 대화를 이어주는 것도 차였고, 그림을 그리기 전에 정신을 가다듬어 주는 것도 한 잔의 차였으니 차와 허백련은 뗄레야 뗄 수 없는 생활 그 자체였다.

70대 후반 허백련은 무등산에 단군신전을 세울 뜻을 세우고 이를 추진하였다. 갈라진 국론과 땅에 떨어진 윤리를 다시 세우기 위해선 우리 민족의 구심점이 있어야 하고, 그게 바로 단군이라는 생각이었다. 우상숭배라는 반대에 부딪쳐 비록 성사되지는 못하였지만, 단군신전을 통해 민족정신을 결집하려 했던 꿈을 그는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버리지 않았다. 허백련의 삶은 나 혹은 내 가족만이 아니라 이웃과 국가 등 넓은 의미의 이웃을 사랑하고, 이끌어 가고자 했던 교육자라는 공인으로서의 삶이다. 남종화의 대가로서 미술사적 업적을 남겼을 뿐 아니라 사회교육가, 사상가로 활동한 의재 허백련의 예술과 삶은 문인이나 남종화 등 옛 것의 의미조차 희미해진 오늘날 더욱 빛을 내고 있다.